상식리뷰

심리학(빅터 프랭클)-1

쭈나니 2022. 1. 6.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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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 프랑클(Viktor Emil Frankl, 1905~1997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빈 의과대학에서 정신과를 전공했고 특히 우울증과 자살에 관심이 많았다. 초기에는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년)와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 1870~1937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평소 호기심이 많던 프랑클은 용감하게 프로이트에게 자기 생각을 편지로 보냈고, 프로이트도 상냥하게 답장을 줘서 서신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또 17세 때 학교 숙제로 쓴 논문이 그가 19세 되던 해인 1924년에 《정신분석 국제 저널(The international journal of Psychoanalysis)》에 발표된 적도 있었다.

1937년 정신과 전문의가 된 빅터 프랑클은 3만 명의 자살위험성이 있는 여성들을 관리·치료했고, 이후 자신의 클리닉을 개업했다. 정력적으로 자기 영역을 만들어가기 시작할 때,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점령해 버렸다. 이때부터 유대인 의사들은 순수 독일민족 ‘아리안 족’의 치료를 금지당했고, 이후에는 유대인만 치료할 수 있는 종합병원에서 근무했다. 우생학적 관점을 앞세워 안락사 프로그램으로 희생될 위험에 처한 수많은 유대인 환자들을 자신의 의학적 소견으로 구하기도 했다.

이런 활약에도 1942년 9월 결국 그는 아내, 부모와 함께 테레지엔슈타트의 유대인 거주지 ‘게토’로 강제 이송되어 일반의로 근무했다. 이곳에서도 그는 열정적으로 자살 방지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사람들이 강제 수용된 심리적 충격에서 벗어나도록 강연해 나갔다. 늙은 아버지의 사망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프랑클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지 않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하루 한 컵의 물이 배급되면 반만 마시고 나머지로 세수와 면도를 했다. 깨진 유리조각으로 면도를 해야 하는 환경이었지만 그는 면도를 거르지 않았고, 덕분에 건강해 보일 수 있어서 가스실로 가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살아남았지만 2년 후 그와 그의 아내는 1944년 10월 19일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로 옮겨졌고, 여기서는 의사가 아닌 일반 수용소 수감자로 강제 노역을 했다. 1945년 3월에야 튀르크하임의 수용소로 옮겨져서 1945년 4월 27일 전쟁이 끝나 해방될 때까지 의사로 근무했다. 그러나 그의 아내 틸리는 베르겐-벨센 수용소로 옮겨져 그곳에서 사망하고 말았고, 어머니 엘사는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동생 월터는 강제 노역 중에 사망했다. 유일한 생존자인 여동생 스텔라는 전쟁이 끝난 후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해 살았다. 프랑클은 전쟁이 끝나고 한참이 지날 때까지 각기 다른 수용소로 뿔뿔이 흩어진 가족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었다. 가족들이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도 모른 채 하루하루를 견뎌나가야만 했다.

전쟁의 생존자로 우울증과 자살 충동을 극복하다

수용소에서 프랑클은 그동안 연구해 온 심리학 이론과 정신의학적 개념을 집대성한 원고를 옷 깊숙한 곳에 숨겨놓았지만, 그 옷을 잃어버리면서 원고도 함께 없어져버리고 말았다. 망연자실한 프랑클은 완전히 제로에서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자기가 직접 보고 들었던 것들, 경험했던 것들을 기반으로 새로운 책을 쓰려고 생각한 것이다. 만일 그 원고를 갖고 있었다면 그 내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겠지만, 몽땅 잃어버린 덕분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그는 F의 사례가 생생히 떠올랐다. 그러면서 육체적으로 강한 사람이 반드시 살아남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살아남느냐 죽느냐는 당사자의 내적인 힘, 즉 이 끔찍한 경험을 개인의 성장에 이용할 수 있는 능력에 좌우된다는 프랑클의 생각은 점차 확신으로 변해갔고 그가 세운 이론의 중심이 되었다.

 

한편으로 그 생각은 그가 끝내 살아남을 수 있게 한 힘이었다. 2년 반 동안 네 군데의 수용소로 옮겨졌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삶을 포기하지 말라’는 마음이 그를 살렸던 것이다. 부모와 아내, 남동생을 모두 잃는 비극 속에서도 그는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사실 그는 아내와 이송된 수용소가 갈리는 바람에 아내가 사망한 것도 처음에는 몰랐다. 그러다가 1945년 8월 전쟁이 끝난 후 빈으로 돌아와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아내가 사망한 것을 알게 되었고, 몇 주일 동안 큰 슬픔에 잠겨 있었다. 비록 목숨을 건져서 고향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자신이 더 살아갈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우울증과 자살을 치료하던 프랑클 본인이 심한 우울증에 빠졌고, 살아남은 그의 친구들은 그가 죽을까 봐 크게 걱정할 정도였다. 다행히도 서서히 우울의 깊은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되면서, “어떤 큰일을 겪는 다는 것, 그것이 무엇이고 얼마나 흔치 않은 일이건 간에 그 사람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다”라는 말을 친구들에게 하기 시작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빅터 프랑클의 로고테라피 - 아우슈비츠에서의 죽음의 문턱에서 통찰을 얻다 (정신의학의 탄생, 2016.01.15, 하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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